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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의 사유,사회] 소설과 게임.

김문기 | 기사입력 2020/12/01 [13:01]

[김문기의 사유,사회] 소설과 게임.

김문기 | 입력 : 2020/12/01 [13:01]

옛 중국에서, 시를 쓰는 것은 교양이고 예술이었지만 소설을 쓰는 것은 매춘과 비견되는 천히 여겨지는 일이었다. 유럽에서 소설은 만악의 근원이라 여겨졌다. 조선 왕조에서 실용성과 효율성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성군 정조 임금은 소설을 읽은 관료들에게 친히 징계를 내렸고 해당 소설들을 불태워 버렸으며, 소설의 문체를 쓰는 이는 과거에 낙방시키고 심한 경우 소위 ‘블랙리스트’ 에 이름을 올려 두고두고 출세길을 막았다.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넓히기 위해선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설 나부랭이’ 에 빠진 이들은 과거 공부, 가사, 심지어 가정에 대한 의무까지 미루고 가산을 탕진한다 믿었다.

 

이 후 수많은 세월이 지나며 체제가 뒤바뀌고, 사회가 변화하고, 고위층과 하층민이 섞이며 소설은 문학이자 예술로 변화하였다. 이젠 사회적으로도 감명 깊은 소설 한 권, 인상 깊었던 한 구절이 없다면 내심 교양이 없다 느끼는 이들이 대다수 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판타지나 무협과 같은, 현대에 재정립 된 장르는 교양보다는 잡서로 취급 받기 일수이다.

 

게임의 역사는 소설과 비교할 때 매우 짧다. 1947년 비공식적인 최초로 군사 훈련 목적의 비디오게임이 등장했으니, 이제 막 70년이 넘었다. 소설이 천 년여를 기다려 포르노에서 교양이 되었으니, 어떤 관점에선 당연하리라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문명의 보급 속도는 중세나 고대 중국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 변화 속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2020년 한국의 10~65세 중 70.5%가 게임을 이용하고 있다. 1987년 최초의 상업용 한국 게임이 발매된 이후, 우리나라의 게임 시장은 2018년 세계 매출 14조 30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국뽕’ 차오르게 하는, 한국의 얼굴이자 한류의 상징이라는 세계 시장규모 7위 K-POP의 산업규모가 3~4조 가량임을 고려한다면, 게임은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약 30여 년 만에 전 세계적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K-POP이 관광산업에 끼친 영향이나 문화적 파급력은 통계화하기 어려운 수치이므로 제한된 비교이다.) 최신의 게임들은 영화와 맞먹는 영상미와 개발자의 철학, 웅장한 서사, 현실과 다름 없는 자유도와 이를 통한 다채로운 전략, 전술 등을 통해 가상현실과 예술 사이의 어디쯤까지 발전했다.

 

게임과 소설의 공통점은 ‘가상의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우리는 주인공에 이입해 감정을 공유하며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한다. 여기서 작가의 유려한 문체나 표현력은 그 자체로도 감탄을 이끌어내지만, 독자가 글에 몰입하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도 한다. 게임 역시, 유저는 자신의 아바타에 자신을 이입시키고, 스스로 모험하며 가상 세계의 사건들을 경험한다. 여기서 뛰어난 그래픽이나 제작자의 게임 내 연출은 그 자체로도 감탄을 이끌어내지만, 유저가 게임에 몰입하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도 한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인지, 게임에 대한 인식조차도 과거 소설의 것과 동일하다. 게임을 사회악이라 규정하는 이들의 생각은 ‘게임에 중독되면, 가사도 가정도 내팽개치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허송세월 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선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는, 260년 전 정조의 소설에 대한 입장과 완벽히 일치한다. 실제로 이들은 플래쉬 게임 사이트를 폐쇄시켰고, 게임을 질병으로 분류했으며, 게이머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현재의 헤게모니를 쥔 세대가 경험했던 초기의 게임은 단순히 자극과 반응의 반복이었다. 공이 날아오면 치고, 적이 오면 총을 쏘는 식이다. 기술의 한계로 서사는 생략되고 게임 내 표현 역시 그저 점의 집합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게임을 경험하고, 게임을 놓은 후로도 게임은 계속해서 발전했지만 그들의 인식은 당시에 머물러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게임에서의 가상경험은 그저 쏘고 때리고 죽이는 수준인 것이다. 이 세대가 게임이 얼마나 진보하였는지 알기 위해선 직접 플레이 해보는 ‘경험’이 필요한데, 그들에겐 시간도 없고, 게임의 조작법도 익숙하지 않으며 경험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결국 게임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자식세대가 플레이 중인, 맥락과 몰입이 배제된 장면의 파편뿐이다. 결국 이들에게 게임 기술의 진보는 그저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쏘고 때리고 죽이는 오락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현대사회가 극한의 경쟁으로 접어들면서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예를 들면 ‘토익 점수’ 같은 취업 스펙 쌓기에도 시간이 모자른데, 고작 게임에 시간을 쏟는다? 이 얼마나 무용하고 해로운 존재인가. 정조의 말마따나 ‘이단(게임)을 물리치고 정도(취업, 자기계발)를 넓히기 위해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느끼는 것이다. 이전의 글에서 말했듯, 게임 역시 강제되는 효율성의 논리로 선택된 취미인데 이러한 진실까지도 기성세대에게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성 세대가 게임의 진보를 이해 할 기회가 충분하지 않고, 또 전국민의 70%가 넘는 '게이머'의 상황과 환경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게임은 사회악이 되고 구박을 받는 것이다.

 

매체의 발전으로 그저 구전되던 이야기가 활자로 적히며 소설이 되었고, 소설에 그림이 입혀져 만화가 되었으며, 영상으로 진보하며 영화가 되었다. 그저 틀어놓고 감상하는, 일방향적 주입이 아닌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는, 양방향으로 유저와 개발자가 소통하는 게임은 분명 영상 이후의 매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성세대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국민 넷 중 셋은 게이머이며, 규제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게임산업은 K-POP의 네 배, 영화 산업의 2배의 규모까지 성장했다. 일방적인 박해보다는, 게임 산업에 대한 몰이해를 동반한 착취 보다는, 게임과 게이머를 이해하고 게임 산업을 산업으로 인정해 이미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한국의 게임 산업을 만개 시켜보는 것이 가정과 국익에 더 큰 도움이 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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