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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을 보내며

경기도민신문 | 기사입력 2024/07/09 [23:01]

신경림 시인을 보내며

경기도민신문 | 입력 : 2024/07/09 [23:01]

  © 경기도민신문

어제 76일은 돌아가신 신경림 시인의 49.

시인의 마지막을 돌보았던 일산 국립암센터 원장 서홍관 시인의 차로 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산소에 다녀왔다. 무더웠지만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유족 및 20여 동료 문인과 함께 무사히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장례의 초종 절차를 주관했던 도종환 시인의 갑작스런 요청으로 나는 장례식에 이어 49재에서도 고별의 말씀을 올렸다. 다음은 그 요지.

우리 동양적 사고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나뉘어, 백은 한 줌 재로 변해 여기 땅에 묻히고 혼은 저 하늘로 날아올라 영원의 세계로 사라진다 합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은 현생의 신경림 영혼과 마지막 작별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제2의 혼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가 남긴 시입니다. 한평생 온 공력과 정성이 바쳐진 신경림 선생의 시는 모국어가 존재하는 한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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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얼마전 한국작가회의의 청탁으로 쓴 글이다. 처음 작가회의 직원이 문자로 한겨레 짬에 발표된 가신 이의 발자취를 전재해도 좋겠느냐 물어서 그러라고 대답했는데, 며칠 뒤의 청탁서에는 원고지 30장의 글을 쓰라는 거였다. 어쩌라는 건지?

결국 한겨레의 글을 두 배쯤 늘이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다음은 그 글인데, 꽤 길므로 시간 나시는 분들이나 읽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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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을 보내며>>

1970년 늦여름 어느 날, 청진동의 창작과비평’(창비) 사무실 건너편 다방 앞에서 누군가와 막 헤어지고 돌아서던 시인 신동문 선생이 그 다방으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내게 원고 하나를 건네주었다. 당시 신동문은 도서출판 신구문화사의 고문 겸 창비 발행인이고 나는 편집장인 셈이었는데, 그는 원고를 내밀며 작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곁들였던 것 같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신경림이란 이름의 시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다방에 앉아 그가 건넨 다섯 편의 시를 단숨에 읽으며 나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서정주나 김현승, 김수영이나 김춘수 등 그때까지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시들과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대표하는 당시의 지배적 형식에 가려져 있던 한국시의 어떤 중요한 핵심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시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작품을 손에 넣어 발표할 수 있게 된 것은 잡지 편집자에게는 드문 행운이었다. 눈길」 「파장등 다섯 편이 실린 그해 가을호 창비가 시중에 나오자 주위의 벗들은 무릎을 치며 환호했고 독자들로부터는 신경림이 누구냐는 문의가 적잖이 들어왔다. 그것은 이제 새롭게 전개될 한국시의 개막선언이었다.

얼마 후 신경림 시인을 만났고, 만나자마자 나는 오래전부터 흠모하던 사람을 드디어 만난 것처럼 순식간에 그와 친해졌다. 그와는 문학에 대해 얘기하든 시국 문제에 대해 얘기하든 금방 공감이 되었고, 말로 나타내기 이전에 감정으로 통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무렵 창비 사무실에는 이호철ㆍ한남철ㆍ조태일ㆍ방영웅ㆍ황석영 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물론 신 선생은 이분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트고 수시로 친밀감 넘친 대화를 나누었다. 창비를 드나드는 이 그룹 이외에도 당시 청진동 골목에는 몇몇 비슷한 문단적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었다. 민음사와 한국문학사가 한때 이 골목에 자리해 있었고 문학과지성사도 멀지 않았으며 큰길 건너에는 동아일보사가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문인들이 본격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신경림 시인은 작지만 반듯한 체구에 곱고 단정한 얼굴이어서 별로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찻집에서도 술집에서도 그는 생활의 고달픔을 좀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도 나도 술을 좋아해서 수백 번 술자리를 함께했으되, 그에게서 신세 한탄 같은 걸 들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눈길앞부분) 같은 처절한 싯구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던가.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 파장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의 탁월한 해학과 낙관은 어떻게 가능했던가. 신경림이 겪은 삶의 역정을 따라가 보지 않고서는 해명되지 않는 그의 문학의 이면이다.

1956문학예술지에 이한직(李漢稷, 1921~77) 시인의 추천으로 발표된 데뷔작 갈대눈길이나 파장과는 결이 상당히 다르다. 갈대는 중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지고 평론가들의 뒤늦은 주목으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갈대눈길사이에는 분명한 단층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결과물로서의 작품의 차이가 아니라 시의 배경을 이루는 세계관의 차이다. 요컨대 1950년대 중엽 스무 살 청년의 여린 감성과 순정의 내면세계가 1970년대의 통렬한 현실인식으로 전화되기까지 신경림에게는 녹록지 않은 진통의 시간이 있었다.

그는 초기작 네댓 편을 발표한 직후 학교도 중퇴하고 서울을 떠나 낙향을 한다. 그리고 10년 동안 힘든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자신은 그때 글 한줄 안 쓰고 책 한권 안 읽으며살았다고 어디선가 썼지만,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서울 생활의 복잡함이 싫었고 기성문단의 구태의연함에도 환멸을 넘어 거의 적대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그는 한때 문학을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가족의 권유에 따른 결혼과 결혼에 따른 생활의 압박도 힘든 것이었다. 그는 집을 떠나 여기저기 유랑하듯 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달픈 낭인생활 속에서 보았던 가난한 서민들의 힘든 삶이 오히려 그를 다시 문학으로 불러들였다. 사실 그는 공사판 같은 데서 막노동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감당할 체력이 안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는 학원에서 영어 강사 노릇도 했고 시골을 돌며 약초나 약재를 거두어 서울 한약상에 파는 사람들의 길안내 일도 했다. 충북 북부지역과 강원도 남서부 일대의 후미진 산골길을 하루에도 백여 리씩 걸었다. 저녁에 여인숙에 들어 양말을 벗어보면 발이 벌겋게 부어 있고 물집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고된 생활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정신적 방황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그때 그는 시골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난했고 세상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수심과 체념으로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그들 탓이 아니었다.”(수필 눈길, 1977)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신경림 자신 그 일원이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존재 즉 억압받는 민중의 발견이었다. 이 깨달음은 그에게 큰 각성과 정신적 안정을 주었고 다시 시를 써야겠다는 의욕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 그는 좀더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문학에 임하겠다는 자각에 이른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시집들의 후기에서마다 비슷한 다짐을 되풀이한다. “얼마 동안 쉬었다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자라면서 들은 우리 고장 사람들의 얘기, 노래, 그밖의 가락 등을 시 속에 재생시킴으로써 그들의 삶이며 사상, 감정 등을 드러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시집 새재후기, 1979) 이렇게 그는 시인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한 순간의 예술적 충동을 표현하는 일보다 자기 현실을 표현할 기회도 능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생각과 정서를 자신의 시 속에 담겠다는 결의를 거듭 밝히는 것이다. 눈길파장을 비롯하여 신경림의 이름을 우리 문학사에 각인시킨 수많은 명작들은 이렇게 하여 태어났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들의 억울한 삶을 목격하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겠다는 결심만으로 그의 시에 질적 비약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무엇이 더 필요했던가. 후일 그는 나는 왜 시를 쓰는가(2004, 시집 낙타에 수정하여 재수록)라는 산문에서 갈대를 비롯한 자신의 초기 서정시가 내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못되었다고 스스로 반성하면서, 갈대시절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종일 이들 헌책방을 빈둥대는 것이 내 일과였다. 나는 여기서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보아왔던 백석, 임화, 이용악 같은 시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며, 카와까미 하지메(河上肇), 백남운, 전석담 같은 사회과학자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신경림 문학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1990년대 이후 문학 공부를 하는 학도들에게는 백석임화이용악은 당연히 읽고 공부하는 텍스트이다. 그만큼 그들은 한국 근대시의 발전의 주춧돌을 놓은 중요 시인들이다. 그러나 1988년 해금 이전에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들을 읽는 것도 거론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집을 소지했다 해서 잡혀가 조사받는 일도 있었다. 백남운이나 전석담도 임화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맑스주의 경제사학자로서, 한국 근대사상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이분들의 책 역시 헌책방을 통해 지하에서만 유통되었을 뿐이고, 용케 기회가 닿는 사람들만 간신히 구해볼 수 있었다. 신경림의 민중체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1920~30년대 변혁이념의 계승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런 은밀한독서였다는 사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신경림 세대의 일본어 독서 능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임화백석이용악 등의 시를 통한 언어와 율격의 계승적 습득은 박목월의 것과 더불어 그의 시를 1930년대에 성취된 우리 시의 건강한 전통에 접맥시켰으리라 믿어진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신경림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시인 김관식의 권유로 1965년 늦가을 10년 만에 시골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와 함께 상경한다. 그리고 홍은동 등성이에 있는 김관식의 무허가 주택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이때의 기막힌 생활 한 토막은 수필 낙엽에 대하여(1972)에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김관식의 무허가 주택에서 산 것은 1년 미만이었고, 얼마 뒤에는 거기서 멀지 않은 포방터시장 근처로 세를 얻어 이사했다. 그곳도 당시에는 홍은동 산1번지로 호칭된 무허가였다고 한다. 이 새집의 주인은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윤식(金允植, 1914~1994) 선생으로, 아들은 유명한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 중 하나인 김학민이다. 김학민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김윤식)와 신경림의 부친은 동갑이어서 부친이 상경할 때마다 반기며 두 분이 함께 술을 즐겼다고 한다. 이 집에 사는 동안 신경림 부인은 아이들을 거두면서도 악착같이 애를 써서 1970년 안양 비산동으로 집을 마련하여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인은 바로 이듬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부득이 신경림은 시골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불러올렸다. 더 불행한 것은 이때 할머니는 치매, 아버지는 중풍으로 고생 중이었다.

나는 1974년 추석 전날 물어물어 안양 비산동 억덕바지로 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전형적인 집장사 집이었다. 분위기도 썰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인은 세 아이를 남겨둔 채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부친은 치매와 중풍으로 작은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결혼 전의 동생이 둘인지 셋인지 얹혀 있었다. 집안 살림은 오직 어머니 혼자 감당했고 돈벌이는 신경림 전담이었다. 나는 위로의 말을 꺼낼 생각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고 얼마 후 할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다시 2년 가까이 지난 1976725일 환갑 지난 지 얼마 안된 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당시의 풍습대로 응암동 집에서 초상을 치르는 중인데, 문상객 중 누군가에게 신경림 부친 별세라는 급보가 날아왔다. 그야말로 화불단행(禍不單行)이었다.

오랜 인고(忍苦)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는 이 삭막했던 시절의 괴로운 삶을 가끔 시의 형식으로 회상했다. 가령, 김학민의 집에 아내와 함께 살던 때는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안양에서 내가 목격했던 모습은 나의 마흔, 안양시 비산동 48943에 각각 처절할 만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이 시들은 모두 시집 사진관집 이층(2014)에 수록돼 있다. 이 시집이 낙타(2008) 이후의 저서이므로 이 시들은 주로 2010년 전후에 쓰였을 것이다. 나이 팔십이 가까워서야 비로소 신경림은 40년 전, 50년 전의 쓰라린 삶으로 돌아가 인생을 바라볼 여유를 얻는다.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회한과 거의 우주적인 높이의 달관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 「전문(시집 낙타에서)

돌아보면 그의 시가 묘사하는 민중의 삶은 그가 유랑과 기행 중에 보았던 이웃 동포들의 것이자 그 자신이 평생 몸으로 겪은 생활이었다. 중년을 지나 노년에 가까워지며 형편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그의 생활과 의식은 서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삶은 그대로 그의 시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다정했으며 남녀와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인용한 시 이 보여주듯 그의 내면에 들어 있는 것은 평화와 만족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평생 허무와 비관주의를 깊숙이 간직한 채 들끓는 감정을 절제하면서 모국어를 다듬어 시적 균형의 달성에 매진해왔는지 모른다. 어쨌든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한국인 누구나가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시의 거의 유일한 작자가 신경림 시인이란 점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의미의 국민시인이 다시 출현하기는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문학에서도 현실에서도 그의 별세로 생긴 공허는 너무도 크다. 지금은 시대적 임무를 마치고 떠나는 시인께 눈물 어린 경의의 고별사(告別辭)를 바칠 시간이다.

# 지난 522일 신경림 시인이 별세하고 나는 장례위원장을 맡아 24일 장례식장에서 고별사를 읽었다. 그런 와중에 한겨레의 청탁으로 고별사와 별도로 가신 이의 발자취(2024.5.26.)를 썼다. 이 글은 한겨레에 발표됐던 회고록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이다.(염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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