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로고

홍범도 장군을 따라서 "범도루트"

경기도민신문 | 기사입력 2024/05/04 [14:59]

홍범도 장군을 따라서 "범도루트"

경기도민신문 | 입력 : 2024/05/04 [14:59]

만주항일무장투쟁의 역사

홍범도 장군을 따라서

  © 경기도민신문

 

  © 경기도민신문

 

  © 경기도민신문


#범도루트 #방현석 #시베리아횡단철도 #역사기행
#홍범도 #안중근 #독립운동

사단법인 희망래일 2024년 상반기 대륙철도기행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
횡단열차를 타고 떠나는 범도 루트

희망래일과 함께하는 '범도루트' 는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러시아 연해주, 만주를 일주합니다.

횡단열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국경버스를 타고 러시아 중국 국경지역을 넘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을 위해 몸을 실었던 열차를 타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갑니다.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이 알려지지 않은 홍범도 장군과 항일 무장투쟁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 일정 : 6월 26일(수)~7월 4일(목) (8박9일)
※ 가격 : 285만원
※ 신청방법 : 예약금 입금과 여권 사본 제출
※ 예약금 : 100만원 국민은행 479037-01-011164 사단법인 희망래일
(예약금은 기차, 항공 예약을 위해 쓰이므로 취소시 수수료가 발생될 수 있습니다.)
※ 문의 : 전화 02-323-5778  /  메일 railhope@railhope.com
※ 후원 : <범도루트>기획단 
<범도루트> 특별굿즈: 범도 부대 특임중대 군번줄, 범도 일지 노트 증정

방현석 장영달 이동섭

 일명 범도()라고도 하며, 호는 여천()이다.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태양욱()·송상봉()·허근()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한 뒤 삼수()·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하여 북청()·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滿)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을 통하여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고,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혁명군 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다시 연해주 이만으로 돌아왔으며, 1923~24년 무렵부터는 그곳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7년 스탈린이 한인강제이주정책을 시행하면서 연해주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의 야니쿠르간 사나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하였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련 정부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고령을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젊은이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한인 극장인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그렇지만, 카자흐스탄 한인 사회에서 독립군 장군 홍범도의 영웅적 업적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생전에 이미 고려극장에서 그의 항일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되었고, 그의 일대기가 《홍범도 일지》로 정리되었다.

조국 해방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 10월 25일,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집 근처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중앙공동묘역으로 옮겨졌다. 1951년 《레닌기치》 기자들을 비롯한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하여 묘를 보수하고, 흉상과 기념비를 세웠다. 그가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해가 봉환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중국비지니스

*중국 전지역 할인 항공권 저렴하게 발권합니다.
*중국 국내선,기차표예매 입장권예약(+수수료발생)
*한중통번역서비스(전문통번역)
*전문 틱톡 왕홍과의 광고 홍보 협연

#연락처
*중국 +86 18600086460(위쳇, 카톡)
*카톡 오픈단톡

*중국여행_보보차이나
.단톡   
https://open.kakao.com/o/gDPKYS9c
.일정 문의상담 
https://open.kakao.com/o/sa5xhAB
.밴드 초대
보보 차이나투어(북경宝步여행사)
https://band.us/n/a7a908Q900Y3Q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