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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시대, 확증편향, 혐오

김문기 | 기사입력 2021/01/29 [17:44]

정보화시대, 확증편향, 혐오

김문기 | 입력 : 2021/01/29 [17:44]

 

 

‘바야흐로 정보화시대‘라는 말도 구식으로 들릴 만큼, 정보전달체계에 새 바람이 분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어느샌가,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자연스레 혐오 역시 자리잡았음을 알게 되었다.

 

정보화 시대를 통해, 개인이 정보에 접근하는 그 문턱은 매우 낮아졌다. 인터넷의 발달 이전엔, 내가 어떤 의문이 생겼을 때는 알법한 지인에게 묻거나 도서관에 박혀 관련 서적을 뒤져봐야만 했다. 그마저 어렵다면, 비슷한 사람끼리 의견을 교환하며 답을 찾아야만 했다. 이 때, 모든 정보는 한 단어, 한 문장이 아닌 수많은 맥락 중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예를 들어 그 의문의 답에 대한 타인의 견해나 관련된 역사, 반론 등이 항상 함께 정보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지인이나 서적과 달리 지금의 정보는 검색을 통해 정확히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내가 원하는 정보 이외의 견해나 역사, 반론 등은 모두 불필요한 정보로 취급된다. 원한다면 언제든 별 수고 없이 다시 접할 수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굳이 지금 당장 관련된 모든 것들을 파악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내 의문에서 유발된 가설을 확증할 수 있는 단편적인 정보만을 취사선택한다. 이러한 성향을 확증편향이라 한다. 

 

확증편향은 인간사에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로마의 카이사르조차도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 생각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라 말했다. 그리고 이를 알고 있던 그조차도 양아들 브루투스의 배신을 보지 못했다. 연인 사이의 콩깍지조차도 확증편향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확증편향은, 과거의 것보다 더욱 강화되고 있는 듯 보인다. 비유를 하자면, 온 산을 오가며 적합한 나무를 베어 깎아 집을 만들던 과거완 달리, 그저 한 자리에 앉아 손끝에서 매 순간 원하는 재료를 구해 집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그 집을 더 빨리 지을 순 있겠지만, 주변에 무엇이 사는지, 기후가 어떤지, 주변에 어떤 길이 있는지 같은 정보는 얻을 수 없다. 그저 집뿐인 것이다. 이전의 정보 수집도 결국은 확증편향이 적용되지만, 정보화시대의 간편한 정보 수집은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더 편협한 정보의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 시대의 혐오와 갈등의 한 원인을 확인할 수 있다. 확증편향이 강화되면서 개인 간의 일반성이나 보편성이라 할 만한 부분이 감소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교집합 자체가 감소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이해가 박해지고, 긴장과 갈등이 늘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혐오가 발생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정보기술을 불태우고 과거로 회귀해야 할까? 아니면, 개인이 접하는 정보에 제한을 두고 규제해야 할까? 그건 또 그렇지가 않다. 개인 간의 접점이 줄어든다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 강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결국 우리들 사이에서 ‘인간’이라는 접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환경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해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접점을 강화시킬 수단을 찾아야만 한다. 몇 년 전부터 불어오는 인문학 열풍에 그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학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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